-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국민 43.9% 표를 얻어… ‘法의 이름’으로 의회와 사법부를 학살하다.--

글/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사진=주경철 교수 SNS
글/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사진=주경철 교수 SNS

히틀러는 총칼로 권력을 탈취한 게 아니라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반대 세력을 구금·살해하고 의회를 마비시키면서 무지막지한 독재 체제를 만들어 나갔지만, 이 또한 형식적으로는 법적 절차를 따랐다. 독재 체제는 법적 정당성을 통해 완수된다.

1938년 독일 법무부 장관 프란츠 귀르트너(Franz Gurtner)가 오스트리아 빈 법무궁을 방문한 모습. 귀르터너는 나치 독재 체제 구축을 위해 사법부의 견제를 무력화하는 일을 마탕서 처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악의 체제가 어떻게 붕괴하는지 보지 못한 채 1941년에 사망했다./게티이미지 토리아
1938년 독일 법무부 장관 프란츠 귀르트너(Franz Gurtner)가 오스트리아 빈 법무궁을 방문한 모습. 귀르터너는 나치 독재 체제 구축을 위해 사법부의 견제를 무력화하는 일을 마탕서 처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악의 체제가 어떻게 붕괴하는지 보지 못한 채 1941년에 사망했다./게티이미지 토리아

1938년 5월 독일 법무부 장관 프란츠 귀르트너(Franz Gurtner)가 오스트리아 빈 법무궁을 방문한 모습. 귀르트너는 나치 독재 체제 구축을 위해 사법부의 견제를 무력화하는 일을 맡아서 처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악의 체제가 어떻게 붕괴하는지 보지 못한 채 1941년에 사망했다.

                      민주주의 파괴 집단에 표를 준 독일 국민

바이마르 공화국은 심대한 정치 위기에 빠져 있었다.

고령인 85세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임명한 총리는 모두 의회 내 다수당 지위를 얻지 못하고 격렬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런 와중에 군소 정당 지도자 중 한 명에 불과했던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어부지리로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는 곧바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 실시를 결정했다. 선거를 통해 다수당 지위를 확보하여 전권을 잡은 후 계획대로 국가 체제를 ‘재주조’할 심산이었다.

투표 일주일 전인 2월 27일에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주의자 루베라는 인물이 국회 의사당에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는 국가 위급 시 의회 동의 없이 포고령을 통해 통치할 수 있다는 헌법 48조를 이용해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위험 인물들을 구금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런 혼란 상황이 히틀러의 선거 전략에 운 좋게 맞아떨어졌다. 3월 5일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의 표를 얻어 집권에 성공했다. ‘고작 43.9%의 지지만 받은 나치’라고들 흔히 이야기하나 사실 이는 독일 정치사에서 예외적으로 높은 득표율에 속한다. 독일 국민은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파괴할 집단에 표를 준 것이다.

이후 일사천리로 사태가 진행되었다. 3월 23일 정부에 전권을 위임한다는 수권법(Ermächtigungsgesetz)이 가결되었다. 히틀러는 의회를 거치지 않고 포고령을 선포하는 방식으로 독재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의회는 단지 히틀러의 연설 무대 구실만 했다.

4월에는 게슈타포(Gestapo·Die Geheime Staatspolizei)법이 통과되었다. 비밀 경찰 기구인 게슈타포는 ‘국가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모든 정치 행위’를 조사했다.

공산당원, 소수 종교인, 유대인, 외국인 노동자, 그 외 막연하게 ‘사회적 아웃사이더’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보호 조치’를 당했다. 국가에 해로운 사람들을 다른 국민에게서 떼어내서 ‘보호’, 즉 구금하는 곳은 나치 친위대(SS·Schutzstaffel)가 운영하는 수용소였다. 1933년 한 해에만 정치범 10만명이 갇혔다.

1933년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뉘른베르크에서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당시 독일 국민은 히틀러의 무도한 정책을 국민투표로 흔쾌히 승인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33년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뉘른베르크에서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당시 독일 국민은 히틀러의 무도한 정책을 국민투표로 흔쾌히 승인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사법부 견제 무력화한 법무부 장관

모든 억압 조치는 아무렇게나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행했다.

예컨대 ‘아리안족’이 아닌 교수와 교사들을 해고하는 조치는 ‘전문직 재생법’에 따라, 나치당 외 모든 정당을 해산하는 조치는 ‘정당 창당 금지법’에 따라 수행했다.

히틀러의 무도한 정책을 국민은 국민투표로 흔쾌히 승인했다. 11월 12일, 국제연맹 탈퇴 건은 투표율 96.1%에 찬성률 95.1%로 승인받았다.

나치 일당 독재 체제에서 일하게 될 국회의원 리스트를 보고 92.1%가 찬성표를 던졌다(심지어 다하우의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 2242명 중 2154명이 찬성했다).

1933년 말까지 히틀러는 의회를 고무도장 찍어주는 곳으로 만들고 민주주의를 박살 냈다.

독재 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사법부의 견제를 무력화해야 한다.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해 준 인물이 법무부 장관 프란츠 귀르트너(Franz Gürtner)다. 그도 처음에는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최소한의 법적 규범을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예컨대 게슈타포의 무도한 수사 방식에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결국은 히틀러에게 적극 협조하는 길을 따랐다.

1934년, 돌격대 세력을 숙청하는 폭력 작전 사례가 대표적이다. 히틀러 집권의 일등 공신이었던 돌격대와 군부가 권력투쟁을 벌이자 히틀러는 군부 편을 들어 에른스트 룀(Ernst Röhm)을 비롯한 돌격대 세력을 제거했고, 이 과정에서 살해 사건이 수백 건 일어났다.

히틀러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다. “현재 나는 독일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으며 따라서 독일 국민의 최고 판관이다. 그래서 반역자들을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법무부장관 귀르트너는 ‘국가의 자위 조치에 관한 법’을 통해 나치의 테러 행위가 긴급 사태 시 반역 행위를 억압한 합법 행위라며 폭력 살인을 용인했다. 살인 행위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라는 일부 검사의 요청은 짓눌러버렸다.

1934년 4월에 설립한 ‘인민 법정’이라는 특수 기구가 대법원을 대체하여 나치의 정적들을 제거해 갔다. 1935년 7월에는 형법을 손봐서 게슈타포나 친위대가 수천 명을 구금하는 행위를 방조했다.

이제 범죄자의 정의는 정치적 반대 세력, 동성애자를 비롯한 ‘반사회 분자’,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자까지 아주 광범위하게 확대했다.

게다가 새 형법은 판사들에게 법 규정에만 얽매이지 말고 국민감정을 함께 고려해서 판결하라고 요구했다. 게슈타포 창설자 헤르만 괴링은 총통(Führer)의 의지가 곧 법이라고 연설했다.

그 말 그대로 히틀러의 테러 행위에 맞게 법을 주물러서 사법의 나치화를 이루어낸 인물이 귀르트너 법무부 장관이었다.

완치하기 어려운 환자들을 안락사시키는 T4 프로그램(Aktion T4)을 히틀러가 허가하는 내용의 문서. 이 조치로 30만명 가까운 희생자가 났다. /위키피디아
완치하기 어려운 환자들을 안락사시키는 T4 프로그램(Aktion T4)을 히틀러가 허가하는 내용의 문서. 이 조치로 30만명 가까운 희생자가 났다. /위키피디아

                                      총통의 의지가 법의 원천

1937년 나치에 입당한 후 귀르트너는 나치의 반(反)인도적 전쟁 범죄에 적극 가담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치하기 어려운 환자들을 안락사시키는 T4 프로그램(Aktion T4)이 그중 하나로, 1939년부터 1945년까지 30만명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지방법원 판사 로타르 크라이시히(Lothar Kreyssig)가 이 조치가 불법이라고 항의하자 그를 해직하며 이렇게 말했다. “총통의 의지가 법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판사직을 유지할 수 없다.” 독일 헌법 체제는 형해(形骸)만 남았다.

1942년 4월 26일 의회는 마지막으로 모여 자살(의회 해산) 문건에 고무도장을 찍고 히틀러에게 ‘기존 법률에 묶이지 않는’ 절대적 권한을 부여했다. 사법부는 죽음의 체제에 충실한 조수가 되었다.

1943년과 1944년에 9600명이 사형당했다. 특히 히틀러 암살 모의 혐의로 잡혀 200명 가까이 처형당했는데, 그중 해군 제독 카나리스, 장군 한스 오스터,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가 자살하기 몇 주 전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정작 귀르트너는 자신이 만든 악의 체제가 어떻게 붕괴하는지 보지 못한 채 1941년에 사망했다.

독일 민주주의가 사망한 해라는 1933년만 해도 아직 악의 체제를 저지할 기회가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국민이 사악한 권력 집단의 거짓말을 용인하고 편파적 법 집행을 감내하려 하는 순간 사회와 국가는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惡의 피해를 본 사람이 惡을 되풀이한다]

---W H 오든의 ’1939년 9월 1일"이라는 시는 ‘희망이 꺼져가는 비굴하고 부정직한 시대’를 이렇게 노래했다(봉준수 옮김).-----

▲엄정한 학문이라면 파헤칠 수 있으리,

루터 이래 지금까지 문명을 광기로 몰아간 인간의 모든 죄과를, 린츠[히틀러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어떤 거대한 자기도취가 정신병 앓는 신을 만들어냈는지를. 우리는 안다,

학생들이 하나같이 무엇을 배우는지 악의 피해를 본 사람들이 악을 되풀이한다는 것을.

망명객 투키디데스는 알고 있었다,

민주주의 운운하는 뻔한 연설을, 독재자들이 하는 짓을,

그들이 무심한 무덤에 대고 말하는 노회한 헛소리를.

그는 모든 것을 책에서 파헤쳤다,

쫓겨난 이성과 고통이 아예 습관처럼 굳어지는 것을, 과오와 비탄을.

우리는 이 모든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한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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